사랑은 감정의 이름이다. 감정은 변덕스러워 연인은 불안하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란 감정을 에너지 삼아 사랑스런 관계를 구축하려 한다. 사랑은 마음을 경작하여 관계로 결실을 맺는 일이다. 42p
용서는 이해가 전제된다.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일만 용서할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하 용서는 위선이다. 46p
너와 마시던 커피는 항상 맛있었다. 50p
사랑은 등이 따스한 것이다. 51p
여진은 사랑받고 산 사람의 얼굴이다. 밝고 맑다. 인생의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씩씩하게 극복하고 얻은 얼굴이다. 어려움 없는 인생을 꿈꾸면 인생에 좀체 없을 어려움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마음이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 나이에 맞는 성장통을 치르고도 저런 얼굴을 가진 사람은 사랑을 많이 받고, 사랑을 많이 주었을 것이다. 여진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그녀가 지나온 시간은 그녀에게 어떤 그늘을 드리웠을까? 57p
I love you. but,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but, I love you. 그러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 같은 단어로 구성되었으나 '그러나'의 위치에 따라, 뜻은 정반대다. 'I love you. But,'은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연인이 될 수 없다는 변명, 'but, I love you.'는 이유와 상황이 어떠하든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고백이다. 결국 '그러나'를 언제 말하는지가 사랑을 결정한다. 사랑은 변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의 낭만성은 쉼표에 있다. 그 앞의 모든 이유와 고난 등을 쉼표가 끊어주기 때문이다. 거기에 깃든 극복의 의지가 사랑이다. 사랑할 이유가 명확해서,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예상된 어려움과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있지만, 그러나 기어이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상황을 무화시키고 뒤집는 힘과 의지가 쉼표에 단단히 들어 있다. 나는 '그러나'의 사랑을 하지 못했다. 내 사랑은 언제나 '그래서'의 사랑이었고, 사랑하는 이유가 명료한 만큼 이별의 이유도 뚜렷했다. 너를 사랑하지만 헤어지자는 거짓말을 해댔을 뿐이다. '그래서'의 사랑이 '그러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부끄러웠다. '그러나'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은 한 음절 차이지만,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크다. 89p
사랑만이 우리를 재창조한다. 91p
외로움으로 뭉쳐진 돌 한 개쯤은 누구나 마음속에 있다. 위로의 말 몇마디로는 절대 풀 수 없는, 어떤 순간 갑자기 돌이 물을 머금고 부풀어 올라 일상을 마비시키는, 다이아몬드만큼 단단하여 깨지지 않는 외로움의 돌, 그걸 알면서도 말을 건네주는 이들은 얼마나 드물고 고귀한지, 나는 알고 있다. 93p
되돌이표는 현실을 벗어나도록 허락한다. 인간의 경험은 시간의 흐름에 입각해야만 현실성을 얻는데, 되돌이표는 과거를 현재로 만든다. 음악이 현실을 벗어나면 소리의 집합으로 추락한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작곡가가 되돌이표를 쓰는 이유는 간절함을 담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 번 지나간 시간도 소멸되지 않고 언제든 갑자기 되살아나 현재가 될 수 있음을. 인간은 결코 벗어나지 못할 지긋지긋한 시간의 제한을 음악에서라도 탈피하고 싶은 것이다. 첼로를 그만둘 즈음에야 되돌이표에 깃든 작곡가의 절박한 심정에 공감했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있는 사람은 되돌이표를 좋아할 것이다. 나는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 여럿인데도, 되돌이표가 싫었다. 다시 돌아가서 그 시간 속의 나를 만나고 그때를 한 번 더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었다. 무엇보다 또다시 그때와 같은 선택을 할까 두려웠다. 102p
평소의 내가 행복하지 않았다면, 평소와 다른 내가 되어야 행복할 것이다. 105p
사랑은 사람을 웃게 만든다. 함께 웃고 함게 미래를 꿈꾸는 순간들이 생의 에너지로 반짝인다. 도쿄타워의 조명은 연인들의 그 반짝임으로 더욱 빛난다. 111p
선택은 두려움과 소유욕의 대결이다. 상대를 향한 소유욕이, 그를 가졌을 때 치러야 할 의무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면 나는 그를 선택한다. 두려움이 더 크면 단념한다. 상대가 내 두려움을 없애준다면, 나는 소유욕을 편안하게 드러낼 수 있다. 소유욕과 두려움은 가장 원초적인 욕구로서, 우리를 지배한다. 그래서 사랑은 내가 그 사람을 갖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나를 소유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113p
사랑은 나를 벗어나 상대를 향해 내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서, 가장 강력한 생의 욕구다. 그래서 사랑하고 싶다는 말은 내가 나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체감하고 싶다는 뜻이다. 다시 사랑한다는 말은 삶을 완전히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강한 바람이다. 141p
나는 기록을 믿지 않는다. 사람들과 다정한 사진들은 많지만 다정했던 기억은 없다. 기록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을 지배하고, 우리는 기억과 기록이 부딪히면 기록을 신뢰한다. 기억은 마음에 저장되기에, 나는 기억을 믿었다. 그러나 기억은 과거를 지금의 내가 원하는 내용으로 재구성하기도 했다. 기억이란 내가 나를 속이고, 내게 속는 일이었다. 결국 기억을 기록하고, 기록을 기억하니 내가 나를 의심해야 하고 의심하는 나를 판단해야 한다. 둘 다 믿을 수 없다. 불신의 긴 시간을 보낸 후 이제 나는 기억과 기록이 부딪히면, 마음의 길을 좇기로 했다. 164p
사랑은 쉼 없는 생각이다. 171p
사랑은 죽지 않는다. 사랑은 끝나도, 끝나지 않는다. 이 문장은 모순이나 진실 되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다짐하는데, 사랑이 영원히 머무는 곳은 기억이다. 사랑스런 기억은, 사랑이 끝나도 우리 안에서 계속 살아간다. 우리는 사랑스런 기억을 갖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다. 기억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의 죽음은 이별이 아니라 망각이다. 절대적 망각,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완전히 잊을 때, 사랑은 죽는다. 연인과 이별한 이들의 유일한 희망이 기억상실인 이유다. 사랑의 기억으로 괴롭다면, 저 말에 깃든 간절함을 이해할 것이다. 188p
어쩔 수 없음을 어떻게든 감당해보려는 마음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190p
사랑은 말과 몸으로 이뤄지는 소통이다. 건네받지 못한 말과 만져주지 않는 몸, 건네지 못하는 말과 만지지 못하는 몸, 그것이 이별이다. 191p
연인은 그들만의 장소를 가진다. 도쿄에서 함께 걸었던 길과 머물렀던 곳은 여진에게서 비롯되어 우리의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그녀를 향한 설렘으로 행복했고, 슬픔으로 울었고, 깨달음으로 아팠다. 우리의 사연을 품은 그곳에서, 여진은 살아있는 어제였다. 그래서 눈물로 눈물을 치유하고, 슬픔으로 슬픔을 넘어서 과거는 지나간 시간으로 기록됐다. 이제 모든 어제는 나와 더불어 추억으로 늙어갈 것이다. 203p
자기 삶을 사랑하면 미래는 두렵지 않다. 내일은 항상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이기 때문이다. 205p
성숙한 사람은 상처를 처리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갖고 있다. 207p
휴식은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마음의 빈칸으로서 휴식은, 일상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시작점이다. 모든 익숙한 것들과 끊어진 도쿄에서 완전한 낯설음과 무료함으로 나는 비워졌고, 나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었다. 새로움은 쉼을 쉼 없이 요구한다. 209p
내게 음악은 소리로 만드는 기도였다. 213p
연주에서 빠르기는 중요하다. 음의 높이와 길이 등은 악보에 의존하지만, 빠르기는 사실상 연주자의 몫이다. '빠르게 하지만 너무 빠르지 않게는 '적당히'와 얼마만큼이나 다른 속도일까. '빠르게'의 빠르기와 '너무'를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불가능하다. 악보에 적힌 빠르기는 작곡가의 지시가 아니라, 연주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러니 메트로놈의 속도보다 자기 몸으로 벼려낸 감각으로 그 속도를 판단해야 한다. 같은 곡이 연주자나 지휘자에따라 몇 분 이상 차이 나는 이유다. 223p
나는 주로 혼자 다녔고, 가끔 여자의 손을 잡고 걸었다. 말없이 걷는 풍경은 다정했고, 말이 통하는 사람과의 산책은 충만했다. 세상을 향한 전원을 끄고 혼자 있는 고독이 쉼이었고, 혼자가 되어야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니 '스스로를 믿으며 천천히'가 세상을 사는 나의 빠르기의 기호다. 224p
그리움은 대상 없는 사랑이고, 미련은 만나지 못할 사랑이다. 227p
치유는 어미 소의 혓바닥을 떠올린다. 송아지가 아프면 어미는 혓바닥으로 핥는다. 아프기 전의 온전한 상태로 되돌리려는 마음이다. '치유'와 '온전하다'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이유가 쉽게 이해된다. 그러니 나는 착한 사람이 되겠다는 환상을 버리고 먼저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치유는 나를 나로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228p
악보에서 리네투노는 표시된 부분부터 '즉시 속도를 늦추고 느리게' 연주하라는 뜻이다. 서서히 느리게 혹은 점점 빠르게처럼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이거나 높이는 것이 아니라, 급정거하듯이 즉각적으로 속도를 늦춰야 한다. 우리의 인생을 악보로 옮긴다면, 지금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스톱!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내게 리테누토는 절박과 다급의 기호이자, 마지막 기회의 신호다. 231p
애도는 슬픔을 잊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241p
분리가 독립이 아니듯, 기댐이 나약함이 아니었다. 기대고 기댐을 받아주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었다. 거기에서 관계가 만들어져 단단하고 깊어졌다. 나는 부모 있는 고아로 살았다. 255p
사랑 앞에서는 진실과 거짓이 명확히 드러난다. 진실로 사랑을 할 때, 인간은 위대해진다. 볼품없는 인간끼리 만나서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스스로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기에 때론 사랑이 폭탄보다 더 시끄럽고 확실하게 우리 삶을 무너뜨린다. 사랑으로 망가져본 사람들은 이 말이 뜻하는 정도와 깊이를 알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무너진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힘도 사랑이다. 사랑은 예상 가능하지 않는 일을 이뤄내는 마법이기 때문이다. 258p
두려워 말자. 삶도 사랑도 모두 사람의 일이니, 나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소녀에게 사랑받았던 사실을 마음에 단단히 품고 모든 오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겠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이지 말고, 조금은 천천히 나아가되 너무 늦지는 않는 '천천히 서두르는'에 맞춰서, 랄랄라 랄라. 275p
드립 커피를 주문했다. 사랑은 일상의 사건이 반복되면서 자란다. 여진의 커피 취향을 내 몸으로 반복했고, 첫 모금마다 내 안에서 살고 있는 여진을 만났다. 그렇게 여진이 알려준 커피를 마시고 여진과 들엇던 음악을 들었다. 사랑은 평소의 자신을 버리고, 상대의 취향과 습관이 내 몸에 새겨지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상대의 눈으로 내 세상을 보게 된다. 나는 여진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하고 여진의 표정으로 웃었다. 내 안에서 여진은 점점 익숙해져서 원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내 안에서 여진의 목소리가 희미해진 이유는 내 목소리와 다르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277p
몸 없이 살 수 있고, 마음 없이도 살 수 있다. 몸 없는 사람이 유령이고, 마음 없는 사람은 환자다. 몸은 마음의 결과물이고, 마음은 몸의 경작물이다. 몸과 마음을 모두 내 것으로 갖고 살아야 한다. 283p
불행이 쌓이면 성격이 상한다. 연인을 향한 후회와 자책들이 내 안을 뜨겁게 만들었다. 내 밖의 세상은 차가웠고, 온도 차이로 내 안은 습기 가득했다. 모든 습기 찬 것들에 곰팡이가 슨다.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내일의 나를 위한 밑거름이 됐다. 나를 부정하고서는 내가 나로서 살기는 불가능했다. 여진의 재회로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첼로 소리는 첼로에 잠들어 있으나 손이 있어야 깨어난다. 첼로와 손은 서로가 필요하되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절이 아니라 연결된 상태로 각자의 자리에 머무는 상태다. 나와 여진의 관계가 이와 같지 않을까. 마루 안쪽까지 들어온 햇빛에 그런 생각이 왔다가 갔다. 288p
내겐 잊혀지지 않는 생각이 사랑이다. 292p
잊지 못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던 많은 밤들과, 이제 나는 작별한다. 모든 일을 겪어낸 내게 사랑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목련이 지고 벚꽃이 피는 봄의 아름다움만 기억하기로 다짐하며, 나는 도쿄를 떠난다. 마지막으로 본 도쿄타워는 첼로를 닮아 있었다. 294p